| <1>
가위질은 영등위원들이 어두컴컴한 시사회실에 둘러 앉아 영화 중에 나오는 떡치는 장면 중에 드문드문 튀어 나오는 털 같은 것이나 잘라내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부러웠다. 신발넘들, 자기들은 볼 거 다 보면서 가위질이나 하고 자빠져 있으면서 말야.
임상수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영화에 판사나리들이 가위질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선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끼들 시간이 남아도나. 영화 필름에 가위질이나 하고 자빠졌게 말이다. 마침표라곤 없는 숨막히는 판결문이나 쓰는 주제에 웬 가위질이야. 그럴 시간 있으면 판결문에 마침표나 몇 개 더 찍을 일이지.
사시 합격자들이 합숙 교육을 받는다는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과목 중 하나가 판결문 쓰는 글쓰기 연습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에코 식으로 조롱을 하자면, 그들이 교육 받는 가장 훌륭한 글쓰기는 되도록이면 판결문이 끝날 때 까지 마침표를 최대한 쓰지 않은 것이지 않을까. 쉼표도 가급적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인이 그 판결문을 읽어내리다가 숨이 막혀서 죽을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가 죽고자 하면 판결문을 읽을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판결문 읽는 것을 포기할 지니.
일반인들이라면 읽다가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는 그 판결문들을 판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읽어 나가는 비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연수원에서 받는 엄청난 체력 훈련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복식호흡 때문일 것이다. 이 훈련은 쉼표와 마침표가 존재 하지 않은 판결문을, 마치 숨을 쉬지 않고 읽어내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특수한 훈련으로서 판결문을 읽다가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제로 포인트로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지 않았을까.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검은 자막투성이었다. 음악이라도 없었으면 뒤쪽 영사실을 향해 “니들 영화 안 틀고 뭐하고 있어?”하고 고함을 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 통제라.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 판사 나리들께서 양손에 가위를 들고 엿을 잘라 파는 엿장수가 되셨나이까.
<2>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 카톨릭의 권위를 위험에 처하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바로 <시학 2편 – 희극>이다. 이 책이 카톨릭의 권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웃음’을 논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카톨릭의 권위는 근엄함, 그리고 비장함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은 이처럼 신상에 덧입혀진 근엄함, 비장함의 권위를 해체시킬 수 있는 ‘웃음’을 만드는 방법을 발설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카톨릭의 권력에 기생해 온 타락하고 부패한 수도사들은 이 책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소설 속의 중세에나 있을법한 이런 블랙코미디가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그 자체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21세기에 살면서도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중세적 비극을 코 앞에서 목격해야 하는 초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초현실은 정치적 긴장감이나 실천만으로는 도저히 실체에 접근할 수도 없거니와 해체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21세기의 중세적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는 정신병자들을 모두 잡아다 가두고 임상학적 방법을 통해 치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까닭에서다. 그것은 죽은 푸코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예술이 있고, 미학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인간에게 예술과 미학을 부여한 것만으로 신은 칭송 받아 마땅하다.
<3>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에 대해서 떠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현처럼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다. 그리고 대통령의 죽음 앞뒤에 놓인 인간 군상들의 어정쩡하고 불가피한 선택은 오지도 않을 고토를 기다리는 배케트의 두 주인공처럼 주체적인 삶에서 괴리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종의 부조리극이다. (이 영화가 비극이라면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영화는 다카기 마사오가 죽던 날 하루를 총체적인 시점으로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횡단면으로 잘라서 그 잘려진 면을 들어올린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은 다카기 마사오 뿐만 아니라 그 잘려진 횡단면에 들어 있는 모든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고대 이집트 왕국도 아닌데 왕이 죽자 졸지에 따라 죽게 된 인간들의 이야기도 다카기 마사오의 죽음 못지 않게 묘사한다. 저격당한 다카기 마사오가 실려 나간 후 한석규가 궁정동 만찬의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위에서 잡은 장면은 따라서 상징적이다.
<4>
이 영화를 더욱 화끈한 블랙코미디로 만든 것은 영화 밖에서 펼쳐진 초현실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를 불편해 하는 이들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신성모독’적 성격을 우선 문제 삼는다. 초가집을 슬라브 집으로 바꿔 놓고 보릿고개 넘던 시절을 벗어나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 준,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다카기 마사오를 고작 여자나 밝히다 부하의 총에 암살된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자처럼 묘사했다는 것이 문제를 삼는 가장 큰 이유다.
한마디로 다카기 마사오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인데 그런 은인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 그들에겐 독재와 그에 따른 폭력과 폭정도 국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다카기 마사오는 김재규를 향해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게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맞다 죽은 수많은 이들을 우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들도 박정희가 술자리에 젊은 여자를 불러다 앉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쯤이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오죽 좋아했으면 암살을 당해도 그런 자리에서, 더군다나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을까) 이들이 불편해 하는 것은 그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이 백주 대낮에 공공연하게 폭로된다는 것. 술자리 입담에서나 오가야 할 이야기들이 '문화'라는 '탈'을 쓰고 수 백만명이 볼 수도 있는 영화관에서 대대적으로 상영된다는 것, 아마 바로 그 것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그 비밀을 가리고자 애써 온 이들을 한번 조롱한 셈인데,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려는 그 안스러운 노력이 빚어낸 촌극인 '사법부의 가위질'로 한번 더 조롱을 당해 결국 두 겹의 조롱을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멀쩡하게 청와대에 있는 현직 대통령도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판에 죽은 독재자 대통령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무슨 대수라고. 그런데 여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은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퇴행성 정치질환자('정신질환자'가 아닌) 중 일부가 그 독재자 대통령의 유령을 야당 대표를 하고 있는 독재자의 딸에게 자꾸 뒤집어 씌우려는 때문.
그들의 그런 퇴행적 마스터베이션이 죽은 독재자를 무덤에서 꺼내어 자꾸 모욕당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어리석게도 그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피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