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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달러 베이비>
Book &amp; Movie | 2005/03/25 08:31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는 핏줄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본능적이고 감정적이다(그 어떤 진보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핏줄'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본능적이다). 씨네21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그가 전언한 것처럼 핏줄이 왜 본능적으로 감정적인 것인지는 "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클린트이스트우드가 '가족'에 대한 철학과 태도의 문제에 오래도록 천착해 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 서부극의 장르적 해체를 시도한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시작한 가족에 대한 그의 관심은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세상 남자라면 누구나 경험했거나 혹은 맞이하게 될 '가장'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연민어린 시선으로 드러낸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가장은 아내가 없음으로 결핍된 존재다. 아내는 사고나 병으로 아이와 자신을 버리고 먼저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주인공들은 아내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종종 딸(아내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과도 불화관계에 놓인다. 그리고 세상에 없는 아내를 향한 슬픈 사랑처럼 불화하는 딸에게 끊임없이 존재증명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한다.(가령 <엡솔르트 파워>, <밀리언달러베이비>)

프랭키와 매기는 겉으로는 트레이너와 권투선수의 관계지만 프랭키에게 매기는 프랭키의 옷장에 보관해 놓은 딸에게 이르지 못하고 반송된 수많은 편지들이 담고 있는 '소망'의 '재현'이다. 불 꺼진 집에 들어설 때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딸에게 가지 못하고 반송된 편지이지만 그의 낡고 비좁은 체육관에 들어서면 권투글로브를 낀 채 샌드백을 두들기는 매기가 그를 반가운 미소로 맞이한다.

프랭키는 유예시키고 있는 아비의 부재를 예상하기에 매기를 끊임없이 트레이닝 시킨다. "네 스스로 너를 보호해야 한다" 아비의 트레이닝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매기는 1회가 끝나기도 전에 상대를 KO로 눕힌 후 그 감격을 나누기 위해 프랭키에게 달려들고 프랭키도 그런 매기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링 위에서 곤경에 처할 때마다 프랭키에게 조언을 구하는 매기. 그녀는 프랭키의 적절한 조언으로 무장한 채 다시 상대를 맞이할 때면 어김없이 상대를 다시 링 바닥에 눕힌다.

챔프에 도전한 그녀가 챔피온을 링 바닥에 눕히고 나서 프랭키에게 달려가고자 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챔피온을 눕히고 돌아오는 자랑스러운 매기를 맞이하기 위해 링 위로 프랭키는 그녀가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올려놓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가장 기쁘고 즐거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소품은 가엽게도 불행의 전조로 급변한다.

매기의 주먹을 맞고 링에 쓰러진 챔피온이 등을 돌린 채 프랭키에게 달려가는 매기를 보고 룰을 어기고서 몸을 일으켜 매기의 뒷통수에 주먹을 날리는 장면은 시시때때로 삶에 무지막지한 형태로 개입하는 불규칙한 운명의 반칙들의 알레고리다.

매기를 향한 프랭키의 관심과 사랑은 프랭키가 매기를 트레이닝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관객에게 감염되기 시작하고 매기가 링에 오를 때 만들어서 입힌 가운에 씌여진 'mokulsha'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어떤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관통하여 눈으로 뜨겁게 쏟아져내린다.

클린트이스트우가 헐리우드라는 지저분하고 난삽한 영화판에서 오롯이 선 '군계일학'이라는 상찬을 듣는 이유가 이 영화 한편으로 명징하게 입증된다는 말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서스팬스와 스릴도 없고,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현란한 CG와 광대한 액션 스케일도 없지만 인간만사의 본질을 톡톡 건드려 내는 관조와 철학만으로도 훌륭한 영화적 장르를 창조해 내는 까닭에서다.


그의 주인공들은 영화에서도 살아있지만 땅에 발딛고 숨을 내 쉬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영화와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미덕일 것이다.영화미학의 카타르시스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을 때 <밀리언달러베이비>는 가장 뛰어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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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조롱, <그때 그사람들>.
Book &amp; Movie | 2005/02/13 14:04
<1>
가위질은 영등위원들이 어두컴컴한 시사회실에 둘러 앉아 영화 중에 나오는 떡치는 장면 중에 드문드문 튀어 나오는 털 같은 것이나 잘라내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부러웠다. 신발넘들, 자기들은 볼 거 다 보면서 가위질이나 하고 자빠져 있으면서 말야.

임상수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영화에 판사나리들이 가위질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선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끼들 시간이 남아도나. 영화 필름에 가위질이나 하고 자빠졌게 말이다. 마침표라곤 없는 숨막히는 판결문이나 쓰는 주제에 웬 가위질이야. 그럴 시간 있으면 판결문에 마침표나 몇 개 더 찍을 일이지.

사시 합격자들이 합숙 교육을 받는다는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과목 중 하나가 판결문 쓰는 글쓰기 연습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에코 식으로 조롱을 하자면, 그들이 교육 받는 가장 훌륭한 글쓰기는 되도록이면 판결문이 끝날 때 까지 마침표를 최대한 쓰지 않은 것이지 않을까. 쉼표도 가급적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인이 그 판결문을 읽어내리다가 숨이 막혀서 죽을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가 죽고자 하면 판결문을 읽을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판결문 읽는 것을 포기할 지니.

일반인들이라면 읽다가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는 그 판결문들을 판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읽어 나가는 비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연수원에서 받는 엄청난 체력 훈련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복식호흡 때문일 것이다. 이 훈련은 쉼표와 마침표가 존재 하지 않은 판결문을, 마치 숨을 쉬지 않고 읽어내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특수한 훈련으로서 판결문을 읽다가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제로 포인트로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지 않았을까.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검은 자막투성이었다. 음악이라도 없었으면 뒤쪽 영사실을 향해 “니들 영화 안 틀고 뭐하고 있어?”하고 고함을 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 통제라.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 판사 나리들께서 양손에 가위를 들고 엿을 잘라 파는 엿장수가 되셨나이까.


<2>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 카톨릭의 권위를 위험에 처하게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바로 <시학 2편 – 희극>이다. 이 책이 카톨릭의 권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웃음’을 논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카톨릭의 권위는 근엄함, 그리고 비장함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은 이처럼 신상에 덧입혀진 근엄함, 비장함의 권위를 해체시킬 수 있는 ‘웃음’을 만드는 방법을 발설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카톨릭의 권력에 기생해 온 타락하고 부패한 수도사들은 이 책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소설 속의 중세에나 있을법한 이런 블랙코미디가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그 자체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21세기에 살면서도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중세적 비극을 코 앞에서 목격해야 하는 초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초현실은 정치적 긴장감이나 실천만으로는 도저히 실체에 접근할 수도 없거니와 해체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21세기의 중세적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는 정신병자들을 모두 잡아다 가두고 임상학적 방법을 통해 치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까닭에서다. 그것은 죽은 푸코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예술이 있고, 미학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인간에게 예술과 미학을 부여한 것만으로 신은 칭송 받아 마땅하다.


<3>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에 대해서 떠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현처럼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다. 그리고 대통령의 죽음 앞뒤에 놓인 인간 군상들의 어정쩡하고 불가피한 선택은 오지도 않을 고토를 기다리는 배케트의 두 주인공처럼 주체적인 삶에서 괴리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종의 부조리극이다. (이 영화가 비극이라면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영화는 다카기 마사오가 죽던 날 하루를 총체적인 시점으로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횡단면으로 잘라서 그 잘려진 면을 들어올린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은 다카기 마사오 뿐만 아니라 그 잘려진 횡단면에 들어 있는 모든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고대 이집트 왕국도 아닌데 왕이 죽자 졸지에 따라 죽게 된 인간들의 이야기도 다카기 마사오의 죽음 못지 않게 묘사한다. 저격당한 다카기 마사오가 실려 나간 후 한석규가 궁정동 만찬의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위에서 잡은 장면은 따라서 상징적이다.


<4>
이 영화를 더욱 화끈한 블랙코미디로 만든 것은 영화 밖에서 펼쳐진 초현실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를 불편해 하는 이들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신성모독’적 성격을 우선 문제 삼는다. 초가집을 슬라브 집으로 바꿔 놓고 보릿고개 넘던 시절을 벗어나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 준,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다카기 마사오를 고작 여자나 밝히다 부하의 총에 암살된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자처럼 묘사했다는 것이 문제를 삼는 가장 큰 이유다.

한마디로 다카기 마사오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인데 그런 은인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 그들에겐 독재와 그에 따른 폭력과 폭정도 국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다카기 마사오는 김재규를 향해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게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맞다 죽은 수많은 이들을 우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들도 박정희가 술자리에 젊은 여자를 불러다 앉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쯤이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오죽 좋아했으면 암살을 당해도 그런 자리에서, 더군다나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을까) 이들이 불편해 하는 것은 그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이 백주 대낮에 공공연하게 폭로된다는 것. 술자리 입담에서나 오가야 할 이야기들이 '문화'라는 '탈'을 쓰고 수 백만명이 볼 수도 있는 영화관에서 대대적으로 상영된다는 것, 아마 바로 그 것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그 비밀을 가리고자 애써 온 이들을 한번 조롱한 셈인데,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려는 그 안스러운 노력이 빚어낸 촌극인 '사법부의 가위질'로 한번 더 조롱을 당해 결국 두 겹의 조롱을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멀쩡하게 청와대에 있는 현직 대통령도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판에 죽은 독재자 대통령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무슨 대수라고. 그런데 여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은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퇴행성 정치질환자('정신질환자'가 아닌) 중 일부가 그 독재자 대통령의 유령을 야당 대표를 하고 있는 독재자의 딸에게 자꾸 뒤집어 씌우려는 때문.

그들의 그런 퇴행적 마스터베이션이 죽은 독재자를 무덤에서 꺼내어 자꾸 모욕당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어리석게도 그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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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Book &amp; Movie | 2005/02/13 14:04
정신과 의사 정혜신이 '남성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답한 인터뷰 글을 읽으면서 눈언저리가 시큰해졌다.

가치없는 욕망들이 대접받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 인간으로, 또 가족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 살아내는 일은 한없이 힘겹다. 직장에서는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고, 가정에서는 당당하고 경제력을 갖춘 가장이어야 하며, 스스로에겐 이런 상태를 늙어 죽을 때까지 유지시켜야 한다는 마법같은 주문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내 정신과 몸뚱아리는 지치거나 피로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럴 틈도 없다. 그저 선로를 따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기관차여야 하는. 휴식을 취하거나 아플 권리도 없는. 고백컨대, 그래서 종종 가장 편안하고 황홀한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다. 꿈자리만 사납지 않다면, 몇 시간이나마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나만의 시간인 까닭에서다.

정혜신이 말한, 그 '개별적 욕망'은 거의 언제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기 어렵도록 방해 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감정에 대한 폭력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다움'이란 자신의 감정은 잘 감추고 자본주의적 욕망은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는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말하자면 '남자답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매우 억압적이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이런 존재론적 모순과 현실을 망각한다. 아니 망각해야 한다.

"남자들이 불쌍하다거나 가엽다거나 하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오히려 남자들의 힘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감정을 절제하며, 가족 부양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만 내 마음 속에 깊은 곳에 있는 울고 싶고, 털어놓고 싶고, 쉬고 싶은, 남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갖는 개별적 욕망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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