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는 모처럼 일찍 귀가하여 미뤄 두었던 잡지 몇 권을 읽고 잠이 들었다. <씨네21>은 지난 주에 연이어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특집판이다. 영화를 먼저 본 이들의 하나 같은 평은 무엇보다도 차마 눈과 귀를 열고 볼 수 없다는 ‘잔혹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영화 잡지뿐만 아니라 <한겨레21>을 비롯한 다른 시사 잡지의 영화지면도 <악마를 보았다>에 관한 이야기들 일색이다. 영화에 관한 이러저러한 글들을 여러 편 읽다 보니 스포일러를 얻게 되어 사전 지식이 생긴 통에 이제 영화를 보면 장르적 재미보다는 ‘잔혹함’의 강도를 채험하는 흥미로움 말고는 얻을 게 없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좀 드는데, 이래서 봐야 할 영화라면 개봉 첫날 영화관을 찾아야 하는 거다. 에잇~!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삶의 저변에는 늘 이러저한 악마 같은 존재들이 있게 마련이 아닐까. 물론 그런 예들은 주로 영화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크리스챤 베일이 주연한 <아메리칸 사이코>에서처럼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자존심에 작은 상처만 입어도 톱질과 도끼질을 일삼는 사이코 같은 악마도 있기도 하거니와 <공공의 적> 1편에서 이성재가 맡았던 사이코 악역처럼 아침에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꼭지 틀어 놓고 쌍욕을 하며 자위행위를 하다가도 마치고 거실로 나와서는 예쁜 딸래미를 번쩍 들어올리며 애정을 표시하거나 부엌에서 아침밥상을 차리는 아내에게 다가가서는 사랑스러운 모닝키스를 건네는 멋진 남편이다가도 자기에게 작은 실수를 한 이들을 찾아 다니며 무자비하게 살인하고 급기야는 부모의 재산을 노려 부모를 죽이는 악마도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안톤 시거 역으로 등장하는 하비에르 바르뎀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저돌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악마의 역을 연기했다. 악마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 바로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저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다음 번엔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는 것, 이게 가장 바로 악마성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근래 골룸 님의 소개(와 도서 대여)로 읽게 된 찰스 부코우스키 소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는 작은 충격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을 쓴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섹스에 대한 탐닉과 알코올, 폭력과 광기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주인공의 삶에 진정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 어쩌면, 진정성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삶 자체가 진정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이야기는 제목을 그대로 반영한다. 검열과 금기의 세계에서 이처럼 막장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광기’이다. 주인공의 삶은 사회 일반의 검열과 금기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비정상’이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느 쯤부터는 정상’이라고 선을 긋는 규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광기’도 마찬가지다. ‘미쳤다’라는 정의에는 제한이 없다. 이것은 마치 도덕의 범위와 수준을 논하는 것만큼 허황한 일이다.
‘악마’나 ‘광인’ 따위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악마가 아닌 척’하는 놈이 악마 같은 짓을 하거나 ‘미치놈이 아닌 척’하는 놈이 미친 짓을 일삼는 것을 볼 때이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악마는, 어쩌면 자신이 하는 짓이 어떤 짓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강간과 폭력만을 일삼는 악마가 아니겠는가, 하는 궁금증이 있고, 부코우스키의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금기와 검열의 기준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주인공 스스로는 거침없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광인’이다.
기실 이런 악마들을 삶과 일상의 주변에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서 <공공의 적>의 이성재가 연기한 악마의 예를 들긴 했지만, 그것은 ‘악마’가 아니라 약간의 정신분열증이 있는 ‘이중인격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이중인격을 가진 이들은, ‘악마’로서가 아니라 추레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거짓과 위선으로 갈라놓고, 거짓이 들통나지 않을까 두려워 거짓의 담장에 또 다른 거짓으로 담장을 쳐 대면서 근근히 일상을 연명을 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대체로 보면, 이런 이들의 거짓은 비루한 욕망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이기적 충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투쟁, 타인의 삶에 해꼬지를 해서라도 존재의 유의미성을 획득하려는 추레한 속물근성 따위.
나이 마흔이 되니,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다. 얻어야 할 것들,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 노력해도 얻기 힘들 것들, 그래서 마음을 접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히 분류해서 목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사람의 관계 문제도 그런 듯싶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대한 기대 보다는 그간 만나왔던 인연들에 보다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두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다. 만약, 이제부터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면,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내 인생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근래 몇 년을 보살펴줬던 이들이 아주 나쁜 방식으로 내게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과거 혹시 내가 그런 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었는지 곰곰이 짚어보고 있다. 결국 잘못은 내게 있는 것이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삶과 인생도 불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긴 해도, 과거에 내 스스로가 내 인생을 보살펴 준 이들의 등에 칼을 꽂고 돌아선 적이 있었다면, 그들도 오늘의 나처럼, 나를 불행히 여겼을 것이다. 그 과거의 내 기억들을 더듬어, 만약 그런 불행한 일들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면 찾아 뵙고 진심으로 참회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중이다.
<파우스트>의 이야기처럼, 악마는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불현듯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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