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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6   감정에 대한 폭력


감정에 대한 폭력
My Story | 2004/02/26 14:10

<1>
월급쟁이로 사는 것이 가끔 하청업자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월급쟁이 하청업자인 내게 하도급을 주는 이는 다름 아닌 ‘운명’. 운명은 내 몸뚱아리 하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야 할 다른 ‘생명’들을 셋(아내와 두 아이)이나 안겨주었다.

그 하도급엔 별도의 지불이 없다. ‘지불’이라고 하면 그저 ‘살아있음’이라는 부도 가능성이 넘실대는 약속어음이 전부일 뿐. 그러니까 하청업자인 나는 유일하게 지급 받은 그 약속어음의 부도를 막아야 내게 기댄 생명 셋을 책임질 수 있는 이중의 짐을 떠안은 셈이다.

(그 어음이 언젠가는 부도날 것이 확실함으로 부도를 ‘막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겠다. 다만 ‘유예’시킬 뿐이겠다.)

월급쟁이에서 자영업자로 변신하더라도 하청업자 신세가 크게 바뀌진 않을 듯싶다. ‘월급쟁이’는 하청업자의 한 방편일 뿐이지 본질적인 조건을 변화시킬 어떤 것은 아닌 이유에서다.


<2>
아내는 한없이 착하고, 또 어느 정도 고집스럽다. 간혹 있게 되는 다툼의 원인 제공자는 거의 언제나 본인이다. 인내심 깊은 그녀는 내게 탓을 하기 보다는 속으로 숨기고 마음을 여미면서 견딘다.

눈을 마주 치지 않거나 말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은 그녀의 인내심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뜻이어서, 전혀 엉뚱하게도, 원인제공자인 내가 오히려 화를 내는 방식으로 긴장 상태에 있는 그녀의 인내심에 잔뜩 날이 선 결기를 누그러뜨린다. 적반하장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덜 상하게 하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럴 때면 나는, 자식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자식의 손에 회초리를 쥐어주고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는 어머니 앞에 선 느낌에 당혹스럽다.

그렇게 아내의 결기를 누그러뜨리고 나면 그 내상은 내게 찾아오고, 별 거부감 없이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잠시 아프고 힘겹지만 아내가 그런 방식으로라도 소통을 해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3>
고종석의 <서얼단상>을 읽다 보면 지금은 작고한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글 한편이 눈에 띈다. 아마 내가 기혼자인 때문이리라. 기혼자인 이유로 어깨 무겁지만, 차마 입밖으로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어떤 정서들로 가끔 무거움을 느끼고 있었던 내게 그 글은 두 겹으로 위로의 말을 전해 왔다.

미테랑에 관한 그의 글은, ‘결혼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랑과 가족에 대한 미테랑의 입장을 존중하는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이타성을 옹호한다. 우리로 치자면 ‘바람 나서 딴살림 차린 남편’에 불과할 수도 있는 미테랑의 그런 행적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것에 어떤 부러움을 느꼈다면, 적어도 우리의 정서를 근간으로 하자면 결혼제도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라고 할 만한 ‘바람난 사람’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옹호’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서가 결혼 바깥으로도 향할 수도 있으며, 또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옹호’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나는 결혼제도 바깥에 놓인 ‘다른 사랑’을 만드는 것을, 더 나아가 미테랑 처럼 거기에 ‘다른 가족(우리식으로 치자면 ‘딴살림’)’을 만드는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하게 비난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우리의 정서가 그것을 쉬이 용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든 그런 가능성 아래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결혼’이 있게 한 사랑보다도 더 진한 사랑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고, ‘결혼’보다 늦게 찾아 온 사랑 때문일 수도 있으며, 배우자의 변심이나 문제적 행동에 대한 반사적 행동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 일반적인 통념 앞에 서면 벌거벗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라는 게 비정상적인 손가락이 하나 더 붙어 육손이인 손을 인위적 수술을 통해 제거해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아닐까.

만약 그처럼 ‘결혼 제도’ 안에서는 결코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면, 그 감정은 제거 대상이 되거나 ‘검열’의 눈길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억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고종석이 ‘결혼은 감정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을 때,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4>
확실히 ‘결혼 제도’는 감정에 대한 폭력이다. 이것은 위의 예처럼 결혼 밖에서 다른 사랑을 만났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 생활 내부에서 발생하는 어떤 감정이나 정서들도 결혼 제도의 틀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절제되고 억눌러지게 된다.

자유스럽게 독립적인 한 인간이었을 때, 충분히 발언해서 해소하거나 상대하지 않은 방식을 통해서 내면화 할 필요가 없는 어떤 정서나 감정들은 결혼 제도 내부로 반입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결혼생활 도중 ‘번잡한 일상을 떠나 혼자 있고 싶다’라는 정서(혹은 ‘느낌’)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느낌을 결혼 생활 내부에서 그대로 발언했을 경우 뜻하지 않은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게 된다. 설명해 주지않고 발언하거나 발언 후 그렇게 실행을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하게 전개된다.

때문에 독립적이고 자유스러운 인간인 이유로 느끼거나 발언할 수 있는 어떤 정서와 감정들은 ‘결혼제도’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절제되고 감추어지며 억압된다. 기꺼이 절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감추고 억압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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