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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바람에 밀려오는 작은 파도들이 모래해안을 넘실거릴 때마다 해안 모래사장은 아름다운 결무늬를 이뤘다. 세상이 흔들리는 듯 큰 바람이 일더니 바다 저편에서 큰 물결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등대보다도 높이 솟은 파도의 벽이 되어 해안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섭고 다급해진 마음에 모래언덕 위에 있는 집으로 전력을 다해 뛰쳐들어갔다. 한숨을 몰아쉬며 창밖을 내어다보니, 그 순간 파도가 집을 덥쳤다. 하얀 파도 거품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파도에 실려온 바닷물이 방을 채웠다가 빠져나갈 때, 하얀 파도 거품사이로 뭔가 꿈틀거렸다. 흰색 거품에 쌓인 작은 용 한마리.. 마치 빛나는 파도 거품의 그림자가 아니었으면 미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하얀 용 한마리가 물이 빠져 나간 자리에 남아 있어다. 크게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파도가 용을 실어다 집에다 옮겨 놓은 것이었다.
희고 작은 용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내 얼굴을 한번 응시하더니 이내 신비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창밖을 향해 날아갔다. 창 밖은 아직 어두웠다.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누르니 형광 불빛창 사이로 새벽 다섯 시 경임을 알리는 숫자들이 깜박거렸다. 다시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결무늬 커튼 사이가 어둡고 흐릿했다. 꿈이었구나.
<2>
기실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접근은 임상의학적인 측면에서였다. 그러니까 꿈은 무의식 속에 숨겨진 어떤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이 바로 '꿈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꿈을 가능하게 하는 '기억된 현실'의 시점이 '현재'부터 과거 어느 시점 사이라는 것을 상정해 볼 때, '꿈의 해석'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꿈이란 '과거' 어느 시점에서 기억('뇌')속에 남겨지고 각인된 어떤 'data'들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따라서 그것이 '미래'의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어렵게 풀었지만, 적어도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미래 예시(혹은 예언)과 별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나는 '태몽'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었다'. <3>
둘째 녀석은,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었다. 녀석이, 생명으로 잉태되기도 전에, 아무래도, 녀석 스스로가 먼저 그것을 눈치챘던 모양이었다. 꿈에 나타났던 '하얀 용'의 생생함은 시간이 좀 지나는데도 여전했었고, 그 기이한 꿈에 날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내 꿈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그것이 '태몽'임을 일깨워준 순간, 나는 어둑한 새벽 바다 위로 힘차게 뛰어 올랐던 그 작고 흰 용 한 마리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선 녀석의 생명이 잉태되었고, 그것이 확인된 몇 개월 뒤에 세상으로 찾아들었다. 어둠이 덜 걷힌 그 새벽녘에도 환한 빛을 내었던 그 작고 희던 용처럼, 온 몸이 하얀 녀석이 태어난 것이다. 그 녀석에게 '은'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3>
이제 태몽을 꾸지 않기로 했다. 건과 은, 이 두 녀석이 바르고 힘차게 세상을 살아나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더불어 두 살 터울이 안 되는 두 녀석을 키우고 거드느라 제 삶의 큰 부분을 송두리째 내어 놓은 아내의 뒷 모습이 늘 애처롭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처럼 아이를 잘 보살피고 돌보는 엄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 녀석에게 큰 애착을 쏟아내는 아내는 정작 자신의 삶을 보살피고 돌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단아하고 깔끔함을 잃지 않던 아내가 간혹 힘들어 보일 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라 치면 그냥 맑게 웃어보였다. 퇴근 길에 가까운 할인마트에 들렀다. 이틀 째, 외부 업무가 있어 음주 상태로 밤 늦게 귀가했던 터라 오늘 만큼은 반드시 일찍 퇴근하리라 약속을 했건만, 또 지킬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은 왜 항상 그럴 때만 터져나올까.. 낮동안 큰 녀석이 몇 차례 전화를 해 와서는 '덤프 트럭'이 갖고 싶다는 '소망'을 전해 왔었다. 아내에게 필요한 게 있냐고 물으니 곶감이 갑자기 먹고 싶다고 했다. 둘째 녀석은 아직 젖병을 물고 있으니 바랄 게 없을 터였다. 결국 밤 열시를 넘겨서 '해방'되었다. 기다림에 짜증나고 지쳐서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전화가 없는 것으로 봐서 큰 녀석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차피 늦은 거.. 하는 생각으로 할인마트에 들려서 장난감 덤프트럭과 곶감 한 팩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2월, 겨울 바람이 매서웠다. <4>
아침에 일어나 아직 잠들어 있는 두 녀석을 차례로 깊게 안았다. 한동안 그렇게 안고 있었다. '아빤, 너희들만 믿고 이제 태몽을 꾸지 않으련다. 맑고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아빠도 최선을 다 하마.. '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그것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 몫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을 나서는 순간 조금 묵직했다. 정서는 참으로 미묘했다. 미묘한 느낌들이 순간적이지만 매우 빠르게 가슴과 머리 속 어떤 곳으로 서로 오갔다. 몇몇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 태몽은 이제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찾아오는 길에, 그가 결코 넘을 수 없을 바리케이트를 쳐 놓은 셈이다. 병원 문을 나서니 계절임을 보이기 위해 힘을 다 하는 듯, 바람 끝이 아직 날카로웠다.
<5>
문득 아픈 기억 하나가 마음 한 켠을 스쳤다.
잊을 수 있을까.. 레테의 강은 살아 있을 때,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더욱 도도해 보인다.
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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